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성 전투 (문단 편집) ==== 11사단 삼현지구 반격작전 ==== 작전을 개시하기 이전, 제11사단은 미 제8군 직할로 소속되어 1953년 6월 14일부터 1954년 2월까지 약 8개월간의 교육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훈련도중 금성 돌출부의 상황이 굉장히 심각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7월 12일 12시부로 사단은 제2군단의 명령문에 따라 군단 예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① 군단은 7월 12일 12.00부로 미8군 명령에 의거하여 제11사단을 통합지휘하여 게속 현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② 제11사단 > ㉮ 제11사단은 현 훈련임무를 계속하라. > ㉯ 예하 1개 연대(사단중포 및 공병 1개중대 포함)를 7월 14일 06.00부로 제6사단에 배속하라. > ㉰ 군단 역습계획에 따라 역습을 준비하라. 제11사단은 해당 명령문에 따라 제9연대 및 사단중포 그리고 공병 1개 중대를 6사단에게 배속케 하였으며 또 유사 시, 역습에 대한 준비를 전 부대에 하달하였다. >① 사단은 군단 역습에 가담을 준비하려 한다. >② 제13연대는 7월 14일 24.00까지 425고지로부터 547고지 사이(729고지 및 노동리 일대)에 대한 정찰을 완결하라. >③ 제20연대 > ㉮ 7월 14일 24.00까지 729고지에서부터 하현리 사이에 대한 정찰을 완결하라. > ㉯ 1개 중대로써 7월 14일 24.00까지 마현 및 삼천봉 일대에 대한 기동수색을 완료하라. 이후 사단은 역습에 대한 준비를 바로 착수했는데 문제는 중공군의 7.13대공세로 인하여 제6사단이 주저항선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때문에 사단은 군단작명 제5호에 의거해 제6사단의 철수를 엄호케 하였으며 철수를 엄호한 다음 6사단의 방어구역을 인수하여 새로운 신주저항선을 점령하도록 했다. >① 사단은 제6사단 방어지역을 인수하고 군단작명에 의거 신주저항선을 공격, 점령하려 한다. >② 미 제5공군 및 군단포병은 요청에 의하여 사단을 지원할 것이다, >③ 제13연대장 > ㉮ 7월 15일 04.00까지 주파리에 이동 즉시 신주저항선 A의 우일선을 점령하라. > ㉯ D일 H시를 기하여 신주저항선 B(425고지에서 602고지에 이르는 선)을 공격 점령하라. >④ 제9연대장 > ㉸ 연대는 7월 15일 18.00부로 원대복귀와 동시에 적근산 북쪽 두목동 일대의 신주저항선 A의 좌일선을 점령하라 > ㉯ D일 H시를 기하여 신주저항선 B(552고지에서 462고지를 연결하는 선)를 공격 점령하라. >⑤ 제20연대는 7월 15일 05.00까지 화천 적근동에 이동 집결하여 사단예비가 되라. >⑥ D일 H시는 7월 15일 18.00이다. >⑦ 통신은 현행 SOI에 의거하라. >⑧ 사단 전방지휘소는 화천 상서면 산양리에 위치한다. >제6사단 작전 지휘하에 투입하였든 제9연대는 공격해온 적 약 1개 연대를 완전히 격퇴시켰으나 좌인접 부대인 수도사단 정면을 돌파한 중공군 제601연대는 제9연대 좌측방에 07.14.07.00에 공격해 왔으므로 07.00 제1대대 엄호하에 제2,3대대를 철수 개시하여 CT770380~CT770360에 배치 좌측방으로부터 드러 온 적을 저지함. >---- ><第11師團 金城地區 戰斗詳報> 中 그리고 사단의 신주저항선 점령 명령을 들은 제13연대는 04시 주파리에 입성 후, 제1대대를 750-567고지간에 배치하였으며 제2대대는 750-797고지 서북쪽 500m선에 각각 배치하도록 했고 제9연대는 7월 15일 05시 부로, 6사단 소속에서 해제되어 사단에 원대복귀함과 동시에 사단의 명령에 따라 좌일선이 되었다. 이렇게, 제11사단은 신주저항선 a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가 7월 15일 18시까지 신주저항선을 공격 점령하라는 명령문을 하달했고 이에 각 연대들은 명령에 따라 반격작전을 즉각 실행하였다. 한편, 전투 이전의 제11사단의 구성원을 보자면 사단 구성원중 무려 과반수 이상이 소졸이었으며 무학력자가 그 다음이고 중학,중퇴와 중졸은 거의 극소수에 불과했다. 또한 사단인원중 경남출신이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중에서 이북을 제외하면 제주도 출신도 분포해 있었지만 거의 극소수였다. 그리고 각 구성원의 전투경험은 당시 사단이 후방에서 약 8개월간의 훈련을 받고 있던 탓에 신병과 고참병 비율의 격차가 거의 없어 전투경험이 굉장히 낮았다. 당시 2군단 작전상보에 기록된 제11사단 구성원중 고참과 신병의 비율은 다음과 같다. 제2군단 예하 사단들의 고참과 신병의 비율[* 출처: 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36~40p, 陸軍戰史 第七券, 陸軍本部, 361p] || 부대명 || 신병 || 고병 || || 제8사단 || 40% || 60% || || 제7사단 || 30% || 70% || || 제6사단 || 35% || 65% || || 제5사단 || 38% || 62% || || 제3사단 || 31.9% || 68.1% || || 제11사단 || 46.5% || 53.5% || 이는 타 사단에 비해 압도적으로 격차가 적은 수치이며 이 때문에 사단의 전투력에도 지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물론 제11사단 사령부에서 작성된 "金城地區 戰斗詳報"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 소질.. 사단은 호남공비토벌 작전을 거쳐 동부전선 고착 방어전에서 강습전을 경험한 보병들이며 약간의 신병이 포함되여 있었음. >---- ><第11師團 金城地區 戰斗詳報> 中 해당 전투상보에서는 신병의 숫자를 약간이라 표현하여 신병의 숫자를 줄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위에 있는 표대로 당시 사단의 신병 숫자는 2군단 내에서 가장 많았다. 또한 제2군단 작전상보에서도 제11사단의 전투력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도 나온다. >각 훈련소에서 16주간의 교육훈련을 받은 신병과 고 병들이며 해당 군단에 배속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뿐 안이라 중부전선에 투입이 처음인 탓으로 전투 경험에 비추어서 우려되는 바가 있었으나... >---- ><作戰詳報, 第二軍團司令部> 中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에도 제11사단은 군단에 배속된 직후부터 지형에 알맞는 훈련을 함으로써 사단의 문제점을 어느정도 해결했고 이후, 사단은 곧바로 제1선에 투입되어 군단으로부터 부여된 임무를 수행해 제6사단 7연대의 후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철수를 엄호한 다음에는 반격작전으로 전환 및 신주저항선 회복을 위한 공격을 개시하는 등의 높은 전공을 거두었다. 즉, 전투력이 낮게 평가받았지만 예상외로 잘싸웠던 셈. >③ 소질 ~ 연대는 장기간 동부전선 고착 방어전에 의한 고(故)로 중부전선의 유동전투에는 익숙치 못하였으며 대중공전투(対中共战斗)는 시초인바 제반상황를 각개 사병에 이르기까지 연구할 시간의 여유를 갖추지 못하였으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교육훈련과 동부전선의 강습체험으로 공격 육박전(肉迫战)에 정신의 무장이 확고하였음.''' >---- ><第十一師團 第二十聯隊 華川地區 戰斗詳報> 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